2014-10-04 서울의 서남쪽 마을 과거 속으로의 여행 3탄 (서울역-청파-용산)

지난 8월 30일 마포시장, 염리동 소금길, 아현시장, 9월 13일 만리재, 약현, 중림, 봉래, 청파 골목에 이어, 이번이 세번째 서울 서남쪽 성저십리(城底十里) 시간여행이다.

본인은 부끄럽게도 불과 얼마 전까지도 성저십리(城底十里)란 말을 몰랐다.

뭐 그도 그럴것이 이런 단어는 책이나, 뉴스, 문화잡지, 그 어디에도 들어 볼 수 없는 그런 단어였다. (빠져나갈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건 본인보다는 어쩌면 이런 시간과 공간에 대한 역사적 단어 하나 제대로 후손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우리나라가 부끄러워 해야 하는 일 일지도 모르겠다..흠흠..

성저십리란 쉽게 이야기 해서 조선시대의 서울을 둘러쌓던 성곽 바깥 십리까지의 마을을 말한다고 한다.

동쪽은 동대문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장동 바깥의 중랑포까지, 남쪽은 남대문에서 용산의 한강변까지, 서쪽은 서대문에서 합정동의 망원정까지, 북쪽은 북대문 에서 북한산 인수봉 아래까지를 영역으로 한다고 한다.

이 성저십리는 면적으로 따지면 4대문 안보다 훨씬 넓었지만 사는 인구는 채 10분의 1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으로 이야기 하자면 일종의 그린벨트였다.

이를테면 성곽중심의 행정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불필요하게 마을이 퍼져나가 관리가 어려울 것을 사전에 예방하는 조치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시대를 상상해 보면 어느정도 이해가 될 수 있겠는데, 사대문 안은 권세를 잡은 권력가와 상인 그리고 그들을 보필하는 하인 계층으로 구성되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행정도시이자 소비도시였던 것이다.

따라서, 성곽 안의 권력을 보호할 두터운 보호층이 필요했으며, 금장(禁葬),금송(禁松) 조치, 즉 묘를 쓰지 말 것과 소나무를 벌채하지 말것을 정해놓아 개발과 오염을 금했다.

이곳 성저십리에서는 성곽내의 야채등을 공급하는 공급처 구실을 했다고도 한다. 용산과 이태원 인근은 주로 이런 공급처였었다고 한다.

성저십리는 어찌보면 성안의 권력을 가진자들의 환경개선 사업중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풍수지리에 의해 성을 보호하려고 한 조치였다고 전해지는 설도 있다.

그러다보니 성 외곽은 배로 물건을 옮기기 쉬운 한강을 중심으로 해서 각종 포구가 발달하게 되었고,

그 포구를 중심으로 성곽 안으로 들여가서 장사하거나 조공을 바칠 물건들을 옮기는 길이 발전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대문(大門)은 조선의 풍운을 담당하는 문으로 생각해, 관리가 철저하다보니 일반인들의 왕래가 어려웠다.

그러니 하물며 시신이라도 나갈 수나 있었을까?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소문(小門)이다.

이 소문 역시 4대문 처럼 4개로 이루어져 있어 시신이나 물건등을 내들이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시신의 경우에는 사대문 안에 모실수 없었으므로 성곽 바깥으로 모셔야 했는데, 동쪽으로는 광희문을 통해 나갔으며, 서쪽으로는 소의문(서소문)을 통해서 나갔다고 한다.

인천 등지에서 한강을 통해 싣고 오던 각종 생선과 소금 등은 마포나루 등에 내려놓게 되니 이곳과 염곡동 등에는 물류 창고 등이 생기게 되고,

이를 옮기는 길이 바로 염곡동 소금길이나 만리재 길 등이었다. 그리고 서소문을 통해 사대문 안에 물건들을 공급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서소문 앞에서 물건들을 조금씩 꺼내 팔기도 하고, 다른 물건들로 교환하기도 했다.

결국엔 서소문 앞을 중심으로 해서 시장이 크게 형성 됐다고 한다. 이 서소문 장터는 하도 발전하다보니 가짜 물건들과 각종 사기군들까지 성행했다고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다 보니 중앙정부는 이것을 이용해 정부의 막강한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각종 중죄를 저지른 죄인들을 이곳에서 처형해 시전머리에서 잘 보이는 곳에 그 시신을 매달아 두기도 하고, 개천에 버려두기도 했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이곳이야 말로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파란만장한 곳이 아니였었나 싶다.

서소문 앞터에서는 사람을 죽이거나 하는 중범죄인을 처형하기도 했었지만, 동학혁명 등 가난한 자들의 한을 풀어 세상을 바꿔 보려 했던 그시대의 내노라 하는 혁명을 주도 했었던 위인 들도 이곳에서 처형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개항시기에는 천주교를 포교하려던 천주교 신자와 목회자등 많은 사람들도 이곳에서 처형당했고 말이다.

최근에 서소문 역사문화 공원을 새롭게 정비한다고 해서 설계공모 등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곳 서소문을 '천주교 성지'라는 하나의 이슈로만 개발하고자 하는 것 같아 보여 의아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그리고 답사중에도 이곳을 인지하지 못하고 아예 스쳐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아무도 이들을 몰라주는 것만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자, 그럼 답사 시작이다.

답사를 출발 할 때 모였던 곳이 구 서울역사 앞 광장이다.

시골출신인 나는 서울에 첫발을 디딘 곳이 바로 이 구 서울역이었다. 내 기억으로 1980년대 말 서울역사는 이미 뒷쪽을 확장해 대합실로 사용하고 있었고, 이 곳은 입구 역할과 약간의 사무실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1980년대 말 서울역>

서울역은 일본 쿄 대학 교수이던 쓰카모토 야스시가 설계했으며, 1925년 준공되었다.

사적 284호로 지정되어 있던 이 곳을, 소유권자인 한국철도공사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자 문화재청이 소유권을 이전 받아, 지금은 '문화역 서울 284'란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눈치 빠른 분은 아시겠지만 제목이 뜻하는 숫자는 사적 번호를 뜻하는 숫자이다.

여기에 전시공간이 들어선 것도 생뚱맞지만, 되돌아 생각해 보면 멋지고 오랜 역사를 가진 이 건물을 서울역의 입구로 사용하면 정말 안됐던 것이었을까 싶다.

철과 유리로 지어진 멋대가리 하나도 없는 휑한 건물을 통해 여행을 떠난다는 것 보다는, 이렇게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건물을 통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고 그 가치를 높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오래된 예쁜 건물 앞에서 친구를 만나, 베낭둘러메고 요즘 유행하는 셀카봉으로 브이자 그려가며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가며 여행을 출발하는 그런 낭만적인 상상을 해본다.

그런데, 요즘 이 서울역 앞에 있는 자동차 고가가 뜨거운 이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 고가를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공원을 만든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람중심의 도시개발의 연장선상의 프로젝트라고 하는데 어째 사람들의 반응이 신통찬다.

뉴욕의 하이라인이라는 공원처럼 재생해서 만들겠다고 하는데, 도무지 닮은 곳이라곤 '재생'이라는 단어 하나 밖에 없는 듯 하다.

오래되서 위험한데다가 높이도 17m 이상 높아 더더욱 위험하기조차 할 뿐더러 도무지 용도조차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라 전문가들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서울시가 욕심을 부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시민의 마음을 헤아려 일을 처리할 것인지 두고볼 일이다.

그럼 이제 천천히 걸어보자

서소문 공원이 있는지 없는지, 아마 우리가 서소문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제대로 못하듯이 그 장소의 존재마저 인식하지 못하고 염천교를 지나게 된다.

아래로 기차가 다니는 기차길의 아찔함을 건너면 수제화 거리가 나타난다.

이곳 수제화 거리는 1950년대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고 한다. 아마 서울역을 중심으로 한 슈샤인 보이들이 모여 구두도 닦고 하다가 자연스레 만들어 진 동네가 아닐까 싶다.

1층에서는 색색이 예쁘기 그지 없는 댄스화 등 멋스러운 구두를 도매로 팔고 있다. 그리고 2층은 수제공장이 있다고 한다.

언제 이곳의 아카이브를 만들어 보는 것도 재미난 일일듯 싶다.

지난번 답사때 마지막 답사지였던 약현성당 주변 길을 지나 청파동 쪽으로 조금 걷다보면 뭔가 심상치 않은 붉은색 담벼락에 눈이 휘둥그래진다.

바로 국립극단이 있다. 이곳은 소극장 판과 백성희장민호 극장으로 되어 있다.

온통 붉은색으로 칠한 이 건물은 옛 기무사 부대 건물을 리모델링 해서 극장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붉은 색 페인트 만으로 군부대에서 독특한 극장으로의 이미지를 각인 시키는 건, 건물이 지니고 있는 일반적이지 않은 형태와 색중에 가장 두드러지고 화려한 붉은 색이 결합되서 생기는 효과 인 듯 하다.

백성희장민호 극장은 1950년대 국립극단 창단부터 극단의 주역으로 연극을 해왔던 백성희, 장민호의 뜻을 기리는 취지의 헌정 극장으로, 연극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거나 완성도가 높은 연극을 주로 올린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조금 걷다보면 본격적인 청파동 골목길들이 나온다.

청파동(靑坡), 푸른 야산의 언덕이 많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이곳의 지형을 보면 동남 방향으로 내리막언덕이 져있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먼저 아침 햇살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건강한 아침 햇살을 보고 자란 풀들은 그냥 아무거나 먹어도 약초 일 수 밖에 없겠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떠오르는 햇살 덕일까? 조그만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버린 이곳에 사는 많은 이들은 남대문 시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른 아침 햇살덕에 부지런한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된 곳이 아닐까 싶다.

언덕을 올라가면 옛 물길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들 발 닫기 쉬운 곳을 찾아 자연스레 만들어진 골목길 들이 꼬불꼬불 구비져 있다.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얼마 안남아 있는 골목길이다.

그곳에 남아 있는 오래된 옛 집들이 보인다.

시간이 꽤나 흘렀음은, 담에 남아 있는 틈, 아슬아슬 벗겨질듯한 페인트들, 그리고 지금은 찾아 보기 어려운 작고 아담하고 예쁜, 수필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낮선 풍경속의 삼각지붕들을 통해 상상 해 볼 수 있다. 아마 저 작은 지붕아래에선 앳띤 여학생이 백열등 아래 얼굴 붉혀가며 조곤조곤 연애 소설을 읽고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시선을 옮겨보니 꼬부러져있는 전봇대가 보인다.

전봇대에 수없이 꼬여있는 전선들은 제집을 찾아 불을 켜 줄 수나 있으려나?

마음 한편이 짠한게, 저 전봇대에 꼬여 있는 전선은 어쩌면 저 전깃줄로 불을 밝히는 집들에 사는 이들이 가난해 저렇게 꼬이도록 내버려 뒀을까 싶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으니 부동산 아주머니가 조용히 뭐하는 사람인지 묻더니 귓속말로 언제 한번 오란다.

좋은 소식이 있다면서.... 개발이 시작되려나?

지나다니며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주로 젊은 분들은 개발되기를 원하고 나이드신 분들은 그대로 두기를 원한다.

둘 다 어쩌면 그 분들에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언덕을 오르며 숨이 턱까지 차면 언제 이 동네를 벗어나 볼까 넋두리 하고,

눈이 온다는 저녁뉴스를 듣고선 아침 비탈길에 쌓일 눈을 헤치며 출근 할 것을 걱정해 설잠 자는게 현실인 것이다.

개발이 되면 거의 대부분 이 마을에 살 수 없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개발이 되면 언덕은 없어지고 빽빽한 콘크리트 덩어리 아파트가 빈틈없이 들어선다.

주차하기 편해지고, 엘리베이터만 타면 집으로 바로 갈 수 있다.

눈길을 걱정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어쩌면 그것은 평생 올수 없는 꿈만 같은 일이고,

이곳에 살기위해선 몇억이 되는 댓가를 지불하지 못해, 그나마 정붙여 살던 꼬부랑길에서 쫒겨나 한숨 내쉬어가며 더 먼 곳으로 쫒겨나듯 삶의 둥지를 옮겨야 할런지도 모른다.

그저 골목이 이뻐서 사진 찍기 좋다는 이유만으로 골목이 남아 있기를 원하는것은 아닌지..

우리의 어줍잖은 낭만만으로 그들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괜시리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다.

발길을 옮겨 숙명여대로 언덕길을 내려가다보니 분위기가 갑작스레 화사해진다.

여대 골목길에는 자체 발광이 가능한 건축자재를 쓰나? 골목이 훤하다.

지나가는 여학생들이 많아지니 나도 모르게 숨을 머금고 배에 힘을 줘본다. ^^

숙명여대 건물들은 깔끔한 프랑스 건물들 같다. 최근에 지어진 건물과 아마도 70년대 언저리쯤 지어진 건물들과 비교해 보는 맛도 있어 재밌다.

조금 더 가서 효창공원에 다다르니, 아이들과 같이 재미나게 놀고 있는 젊은 엄마 아빠들 투성이다.

서쪽으로 누워가는 햇살에 반사되는 젊은 부부들과 아이들의 실루엣들은 반짝반짝 모래알처럼 빛이 나는것이 귀중한 우리의 미래 유산처럼 보이기도 한다.

답사의 절정인가 보다.

용산신학교 방향으로 향했다. 여기도 언덕(효창원로)이 있다. 재래시장이 있어 길이 재미가 있다.

시간이 으스름한 저녁이 가깝다보니, 자연스레 언덕 가득 노을져 흑과 백으로 그림자가 짙게 만들어 지는 것이 동화나라의 그림자 놀이처럼 아름다움이 그지 없다.

그림자 놀이의 주인공이 되어 도착한 곳은 오늘 마지막 답사지인 용산신학교와 원효로 성당이다.

이곳은 파리외방전교회의 부속 신학교와 성당이었다.

용산신학교는 1892년 준공했고, 원효로성당은 1902년 준공했다.

그런데 가만보니 원효로성당은 명동성당의 주교관과 비슷하다. 그 이유는 두 건물 모두 프랑스인 코스트신부가 설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포인티드 아치와 첨답의 모습이 건축양식을 따지자면 고딕양식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은 신학교가 혜화동으로 이전해 성심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최초의 신학건물로서의 의미가 높은 건물이 용산신학교라고 한다.

내부로 들어가면 그 스케일이 주는 편안함이 좋게 느껴진다.

이 세상의 온갖 불안함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그런 공간감이다.

벽돌을 만져보니 손가락 끝으로 까끌거리는 느낌이 참 좋다.

성당 밖에는 손을 내밀고 있는 예수상이 거룩하게 서있다.

요즘 같이 슬픔이 가득한 이도시를 바라보는 예수상의 표정은 더더욱 안타까워 보인다.

두손을 내밀며 슬픔의 도시를 포용하려는 어둠에 묻혀가는 예수상을 뒤로 한채 그렇게 서울 서남쪽 마을 답사를 마쳤다.

길에는 세아릴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싶다.

앞으로도 하나하나 그 이야기를 헤아리며 곱씹어 음미해보자. 깊어가는 가을속에서..

<답사코스 참조>

http://rblr.co/Ap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