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13 서울의 서쪽 마을 과거 속으로의 여행 2탄(만리재, 약현, 중림, 봉래, 청파 골목)

2014-09-13 서울의 서쪽 마을 과거 속으로의 여행 2탄(만리재, 약현, 중림, 봉래, 청파 골목) 답사를 다녀왔다.

<사진 : 만리재 옛길>

가을로 막 접어들기 시작한 서울의 서쪽 도성의 바로 바깥쪽의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곳을 부르는 지명은 거의 대부분 언덕에 대한 단어들이다.

언덕을 뜻하는 우리말과 한자 등 각각의 단어들을 모아보자면..

언덕, 고개, 재, 고개 현(峴), 기슭 애(厓), 언덕 아(阿), 언덕 파 (坡) 등등(아마 찾아보면 더 있을 것 같은데...그건 나중에 더 찾아봐야겠다.....^^)이 있는 것 같다.

이 동네에 사용한 언덕과 관련된 지명을 찾아보면..

첫째로 공덕동(孔德洞), 여기서 공덕은 공자의 덕을 뜻하는 것 보다는 '큰 언덕'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 동네가 하도 언덕들이 많아 통칭하는 것으로 보는게 맞을 듯 하다

둘째로는 아현(阿峴), 큰고개는 대현, 작은 고개는 아기 고개(兒峴)라 해서 아현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세째로는 애오개(아현의 달리 부르는 말), 조선시대 사람이 죽으면 동쪽은 광희문, 서쪽은 서의문(지금 불리는 명칭으로 서소문)을 통해서 나갔고 그 시신을 만리재, 애오개, 와우산으로 모셨다고 한다. 특히 아이가 죽으면 더 서글퍼 해서 그 애절함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어 만리재 보다 조금 낮은 곳에 매장을 했는데, 그래서 불리는 명칭이 아이고개, 애고개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고 하니 지명에서 느껴지는 애절함이 더더욱 그득하다.

네째명칭 만리재(萬里재), 만리현(萬里峴), 조선시대 세종때 학자였던 최만리가 이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명칭을 만리동이라고 하는 것과 인왕산 줄기가 만리에 이른다고 해서 만리현이라고 했다고 하는 설이 있다.

다섯째 지명 청파동(靑坡), 푸른 야산의 언덕이 많아서 청파라고 했다고 한다.

여섯째 지명인 약현동 (藥峴), 청파동과 약현동에는 의약재로 사용되는 약초가 많았다고 한다. 약초가 많은 언덕이란 뜻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대부분 걸어다녔고 그러다 보니 거리를 단축하려면 어쩔수 없이 이런 언덕을 수없이 많이들 넘었을 것이다.

아마도 언덕을 뜻하는 단어들과 그 지명이 생각보다 많은 것은, 이렇듯 조상들이 언덕을 오르내릴때 때론 고생깨나 했고, 때론 슬프기도 했고, 때론 약초도 캐고 놀이도 즐기며 생활 했음을 뜻하는 그들의 민초적 생활상이 반영되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지난번 답사했던 염리동과는 또 다른 생활상이 녹아 있는 지명들이다.

염리동 일대는 생필품, 생활수단이 곧 동네명칭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공덕, 아현, 만리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이곳을 꼭 지나가야만 하는 애뜻함까지 절절히 녹아 있다.

<사진 : 청파동 언덕>

또 재미난 것이 있다.

이곳의 놀이 문화다. 이곳 만리재 언덕을 중심으로 아현쪽 사람들과 3대문 밖에 사는 사람들 간의 돌과 몽둥이를 들고 벌이는 석전(石戰) 놀이가 있었다고 한다. 놀이라고 치기에는 패싸움 같고 상당히 거칠게 느껴지지만 아현쪽의 사람들이 이기면 그 해에 풍년이 든다고 해서 무조건 아현 사람들이 이기도록 승부조작(?)을 했다고도 한다. (오호~ 이거 뭐지? ㅎㅎ)

언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꽤나 터프한 놀이이고, 어쩌면 전쟁을 흉내낸 일종의 민방위 훈련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이 대단한 놀이로 단련된 이 지역 사람들은, 실제로 일제시대에 일본군인을 돌로 때려 눕힌적이 있어 일본은 이 놀이를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고 한다. (아무튼 이동네를 지나갈땐 조용히...착하게 지나가야겠다...^^;;;; )

자, 그럼 그 골목으로 들어가 보자.

1970년대에 이곳 마포에 마포대로를 중심으로 개발계획이 수립된다. 그에 맞춰 1972년 만리재 큰길을 큰 폭으로 확장공사를 하게되었고 이 길을 따라 두갈래로 동네는 크게 갈라지게 된다.

그 옆에는 자그마한 골목길들이 아직 남아있다.

공덕동에서 부터 그 골목길 초입에 들어서면 1970년대 당시에 건립 된 것으로 보이는 '신흥연립'을 만나게 된다.

7개의 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ㄷ자 형태의 내부 도로를 따라 배치한 연립이다.

1층과 2층의 입구를 분리하고, 콘크리트와 조적을 분할해 쌓았으며, 입구의 아치와 돌출 입면은 힘과 부드러움이 조화된 조형미 넘치는 입면을 가지고 있다.

단지 내부의 공간감에서는 건물의 높이와 내부 도로 폭이 거의 1:1 이어서 아기자기한 휴먼스케일을 연출하며 공간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프라이버시를 중요시 하는 현대인들의 생활 패턴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은 두루두루 모여 화투 치시기 딱 좋은 거리감이다.

추측해보건데 아마도 나름 당시엔 좀 산다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한다.

예전 학부시절에 혜화동 동숭아파트를 조사하다보니, 최초로 지어진 이런 시민 아파트들은 어느정도의 재정적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처음에 입주해서 살았다는 기록을 본적이 있다.

기약하긴 어렵지만 다음에 이곳에 들러 내부도 좀 살펴보고, 이곳에 살았던 분들의 그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그런 곳이다.

<사진 : 신흥연립>

이 길을 따라 이십여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다가 만리재 큰길로 살짝 올라가면 한겨레사옥을 마주하게 된다. 한겨레 사옥의 첫 느낌은 뭐랄까 마치 이천년전 모든 아픔과 죄를 혼자 다 짊어 지고 언덕을 오르던 한사람의 머리에 씌워졌던 가시 면류관을 쓴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콘크리트 뿜칠로 마감된 거친 외관에다가 굵고 돌출된 녹색의 후레임은 보는 순간 무신론자인 나에게 까지 확 와닿는 묵언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만 같다.

설계자의 의도는 달랐겠고, 교회도 아닌 언론사 건물을 보고 그런 상상을 하게 되는, 지금 한국의 모습이 너무도 입맛 씁쓸하고 가슴 가득 묵직하게 다가와 한편으로 짠하기 까지 하다. * 자료를 찾아보니 한겨레 사옥은 건축가 조건영씨가 '프랑스 바스티유 감옥'에서 모티프를 얻어 설계를 했다고 한다. 곡면의 건물 모양은 두 팔로 세상을 감싸 안는 모습이며, 뾰족 탑은 '펜'을 상징한다고 한다.

세상의 온갖 압박에서 국민을 감싸 안아 바른 소식을 전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작품이다.

<사진 : 한겨레사옥>

내친김에 한겨레 신문사가 맞닿아 있는 골목길을 뚫고 지나가 보자.

하드 하나 시원하게 입에 물고 이골목 저골목 헤매다 보니 골목길 구비구비에 의류 부자재 공장, 그리고 의류 수공업 공장이 즐비하다.

주로 가까운 남대문시장에 공급하는 공장들이다. 그 모습들은 동대문 시장 부근에 위치한 언덕인 창신동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참고로 창신동 골목들은 동대문 시장에 납품을 한다.

동대문과 남대문은 도매에서 부터 시작해서 저렴한 소매에 이르기 까지 판매 단가를 낮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원가를 낮추는건 당연한 걸거다.

구비구비 언덕에 위치한 동네의 싼 임대료를 장점으로 창신동과 만리동은 의류자재를 공급하는 중요한 의류 혈류를 갖추게 되었다. 지형적인 특징이 산업과 연계되는 재미난 모습이다.

<사진 : 의류공장>

그런데 이곳 주택가를 걷다보니 염리동과는 조금 다른 주택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아현쪽은 이번에 보질 못했지만 이곳만 먼저 살펴 보자..

붉은색 싼 벽돌에 삼층정도 되는 주택들이 대부분이다.

초석을 살펴봤더니 대부분 90년대 초에 새로 지어진 다세대, 다가구 주택들이다.

그때당시에 소규모 개발업자를 지원하고 골목길에 주택 공급을 늘린다는 취지에서 다세대, 다가구의 규제완화를 실행했다.

거의 대부분의 주택의 형태가 바뀐게 이때이다. 공급물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2000년대 초에는 공급과잉까지 됐었다.

이곳역시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재개발지역으로 묶인다는 희망에서 벌인 일종의 지분쪼개기(?) 였을까?

집이 새로 지어져 생활하기 편해 졌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오밀조밀한 육칠십년대 집들의 오손도손한 맛이 있는 것에 비해, 90년대의 삼사층의 싸구려 붉은 벽돌 다세대, 다가구 주택들은 등지고 뒤돌아 서서 다들 들어오지마 라고 이야기 하는 것 처럼 정머리 없이 이방인들을 내쫒는것만 같아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든다.

<사진 : 주택촌>

조금 더 걷다보니 1927년에 지어졌다는 성우이용원이 나타난다.

굳이 년도를 추적해 거슬로 올라가지 않아도 정말 그쯤 되어 보인다.

찌그러진 문과 찌그러진 벽, 찌그러진 창문들은 공간과 시간이 뒤틀려버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나라를 상상하게 한다. 저 문을 통해 들어가면 시계를 들고 있는 토끼가 서있을것만 같다.

저처럼 시간을 정지시켜 놓기도 참 어려웠을텐데.. 용케 그대로 얼려놔 버린 주인장도 참 신기한 인물이라고 할 밖에 없다.

<사진 : 성우이용원>

그 길을 따라 왼편으로 꺽어 언덕을 내려가면 또 시간이 정지된 장소인 만리시장에 이르게 된다.

1970년대 후반, 막걸리 한잔에 나무 탁자를 두드리며 이미자 노래를 불러제낄 법한 폼새들이다.

당장에 어디 한구탱이에 앉아 동태찌게 시켜 놓고 막걸리 한잔 먹어보고 싶을 정도다.

<사진 : 만리시장 상점>

그옆에는 육칠십년대 영화제작소와 세트장으로 쓰였다는 건물이 포스를 뿜어내며 있다.

옹기 종기 단을 달리하는 계단은 지금 사진에 담아도 그 조형미가 참 대단하고 할 밖에 할말이 없다. 햇살을 등지고 서있는 건물을 감탄하며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 : 옛 영화제작소 부근>

시간이 더 늦어지기 전에 손기정 공원으로 이동했다.

1918년 종로에서 이곳 만리동으로 이전하게 된 양정고등학교가 바로 전신이다.

지금은 학교는 이전하고 이곳 출신인 마라톤 영웅 손기정선생의 기념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본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은 부분 보수를 하고난후 손기정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엔 손기정선생이 마라톤 금매달과 함께 받은 부상으로 받은 참나무가 있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금매달을 받는게 치욕이였던 손기정선생이 이 월계관수로 가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속의 바로 그 나무이다. 이것이 그 나무라고 생각하니 여기, 지금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고 숙연해지기도 한다.

햇살이 참나무 가지에 부딪혀 부서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뒤로하고 약현성당으로 향했다.

<사진 : 손기정 기념관과 월계관수>

오늘 일정의 마지막 코스인 약현성당이다.

무척 다행이게도 노을이 지고 있는 이 시간에 미사가 거행되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서쪽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쏟아지는 빛줄기는 그 앞에 서있는 모든이 들에게 신비롭고 경이롭게 다가온다.

종교가 없는 나 조차도 꿇어 앉아 내 죄를 고하고 사함을 받아내고 싶어진다.

사진이나 찍어대지 말고 자리에 앉아 기도를 할 걸 잘못한 것 같다.

<사진 : 약현성당>

이번 답사에서 살펴본 모습들은 만리재가 품고 있는 모습들 중에 극히 일부라고 생각된다.

역사의 한 자락으로 볼 것인지 종교의 한자락으로 볼 것인지 논의조차 시작도 못한 서소문 공원, 갑작스런 황당한 공원개발이라는 이슈를 몰고온 서울역 고가, 코레일에서 개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논 염천교 개발 지역까지..

살펴볼 것도 이야기 나눌 것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곳이다.

골목은 우리에게 추억이자 존재의 이유이다.

우리가 골목을 돌며 추억을 곱씹고 행복해 하는것은 어렸을 적 기억들이 이곳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땅따먹기 하고, 자치기 하고, 고무줄 놀이를 하던 바로 그 골목들은 우리들의 바로 얼마전의 모습들이다.

나이들어 가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황량한 도시속에서 미미하게 사라져가는것만 같은 내 존재의 바탕은 아마도 그곳에 있는 것이겠고, 아마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우리는 행복해 하는 것 아닐까?

살기 좋은 마을을 잘 가꾸고 만들어서 맛있는 밥이 뜸이 들고 구수한 된장찌게 끓이는 냄새, 생선 굽는 냄새가 골목 가득히 퍼지길 빌어본다.. <이번 답사코스> 램블러 기록 : http://rblr.co/AkLL